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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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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지주일 (나해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1-03-29 11:38   조회: 3,017회

본문


주님 수난 성지주일 (나해) -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성지주일 전례의 말씀은 예루살렘 입성을 환호하는 기쁨과 수난과 죽음을 전하는 슬픔을 함께 전한다. 인간들은 주님을 높은 데서 오시는 영광스러운 왕으로 환영하지만,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십자가상에서 초라하게 돌아가신다. 참으로 알아듣기 힘든 신비다. 신비는 본성상 참여할 때에만 드러난다. 수난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습이자 우리들의 자화상을 발견함으로써 이 신비에 참여할 수 있다. 등장인물 중 나는 누구일까? 

등장인물 대부분은 군중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환영하다가, 기대에 어긋나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겠노라고 다짐하다가도 자신의 기대와 다른 상황이 닥치면 주님을 외면하는 익명의 우리 모습이다. 유다는 왜 주님을 배반했을까? 아마도 '스승은 이 난관을 잘 극복하여 돌아가시지 않을 것이다'라는 자기 식의 판단을 하였으리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기 식대로 판단하여 예수님을 이용하는 인간 모습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다.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실생활에서 주님을 증거하지 못하는 우리 모습이다. 그러나 다시 마주한 그분의 눈길에서 통회로 제 모습을 되찾기도 한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남의 눈이 두려워 죄인으로 내어준다. 남의 눈을 의식하며 이해관계에 따라 진실을 외면하는 비겁하고 무책임한 우리 모습이다. 사제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자신의 물질적, 정신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고발한다. 안정적 환경에서 열심히 살다가도 자신의 이익이 침해 당할까 의심이 들면 살기를 품고 저항하는 인간들 모습이다. 군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면서 직무라는 명분으로 채찍질과 가시관으로 주님을 조롱한다. 때로는 상대가 누구인지, 왜 그러는지 모르면서도 험담하거나 무시하고 조롱하는 인간 모습 아닐까? 그리고, 처형되시는 예수님을 멀리서 보면서 피눈물을 흘리는 성모님과 부녀자들이 있다. 삶의 질곡에서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 없이 한 맺혀 눈물짓는 이들, 좌절과 절망 속에 울부짖는 이들로 가득 찬 세상 풍경이다. 이 상황에서 나는 누구인가?

이들 가운데 돌아가시는 예수님께 시선을 돌린다. 죽음 앞에 선 예수님은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라고 외치신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절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생히 옮기려는 마음에서 마르코는 그리스어로 복음을 기록하면서도 이 구절은 예수님 시대에 사용한 아람어로 기록했다.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냐고 절규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는 점이 놀랍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버지이셨기에 절망 속에서도 아버지께 나아가신다.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외침은 아버지를 원망하는 물음이 아니라, 삶의 근본 문제를 아버지 앞에 드리는 절규였다. 여기에 당신 죽음의 깊은 신비가 감춰져 있다. 고통은 왜? 늙음은 왜? 죽음은 왜? 불의는 왜? 이 모든 절망에 찬 인간 삶의 물음에 예수님은 답을 주지 않으신다. 그 대신 예수께서는 이 모든 질문과 아픔을 짊어지시고, 이 절망을 끌어안아 아버지께 드리신다.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절망과 고통을 대변하여 아버지께 외치신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그것이 예수께서 마지막까지 보여주신 사랑이었다. 절망과 고통을 포함하여 우리가 겪는 모든 삶을 아버지께 이끄시는 것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궁극적 목적이었다.

마르코에 의한 수난기의 결론이 예수께서 숨을 거두신 직후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라는 말씀에 담겨있다. 성전의 휘장은 본래 하느님의 모습을 감추던 베일이었다. 이 베일이 찢겨졌다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온전히 드러나셨음을 뜻한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을, 인간에 대한 당신 사랑을 드러내셨다.

이 상황에서 예수님을 지켜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고백한다.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숨을 거두시는 모습을 보며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까닭이 의아하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목숨을 구한다면 메시아로 믿겠다고 요구했다. 당신의 능력을 만천하에 드러내면 더 효과적으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증명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러면 죽음에게 지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죽음을 피해 도망가면, 죽지 않았기에 죽음을 이긴 것이 아니라 죽음보다 약해서 죽음에게 진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괴로워 죽을 지경”(마르 14,34)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이 잔을 거두어 주시기를 청하셨지만 결국 죽음을 겪으신다. 아버지의 뜻이라면, 죽음이라도 온전히 받아들이신다. 아버지의 손에서 죽음까지 받으셨기에, 죽음에 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죽음이 힘을 잃게 만드셨다. 죽음으로 죽음을 꺾으셨다. “그렇게” 머리를 푹 숙인 가장 철저한 패배자의 모습으로 죽음을 이기셨고 백인대장은 그런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본다. 수난과 죽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가장 결정적으로 보여 주는 순간이 되었다(안소근, 굽어 돌아가는 하느님의 길, 201-208참조).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이렇게 드러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셨다.

성주간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의 십자가로 받아들이라는 초대의 시간이다. 주님의 수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내 모습을 보자. 삶이 고통스럽다면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외치신 예수님처럼, 우리의 고난과 절망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말씀드리자. 벌거벗긴 채 매달리신 예수님처럼 우리 모든 것을 아버지께 드릴 때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의 휘장을 찢고 내 앞에 드러날 것이다. 죽음 없이 부활은 없다. 십자가의 수난 없는 부활의 영광은 없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죽음을 받아들이신 예수님처럼, 일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내려놓고 죽을 때, 아버지께서 주시는 새 생명이 우리 앞에 드러날 것이다.

"구세주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으니 저희도 주님의 수난에 참여하여 부활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하소서." (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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