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수요일
본문
성주간 수- 저는 아니겠지요?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독서)
고통에 대해 하느님께 탄원하기보다는 그대로 수용하는 모습을 그린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다.
"구약 성경 전체의 흐름 안에서 주님의 종의 노래가 보여주는 매우 특별한 요소가 여기에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고통이 하느님께 징벌을 받은 표지로 이해되거나 거부해야 할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면,
이 노래들에서는 고통에 대한 긍정적 이해가 시작되는 것이다."(안소근, 구약성경주해 이사야서 40-66장)
죄가 없으면서도 고통과 수모를 받아들이며 끝까지 '아버지'를 찾으시던 예수님이 떠오르는 말씀이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복음)
성주간 첫 3일간의 복음에서 유다의 배신 이야기가 반복된다.
빵을 나누는 성찬 공동체 안에서 유다의 배반이, 우정의 단절 사건이 벌어진다.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주님과 함께 살던 유다가 이렇게 된 근본 이유는 무엇일까?
유다의 행위 중심에는 포기할 수 없는 '자기'가 있었다.
말씀을 듣기 위해 주님 앞에 머물기보다, '자기'를 주장하기 위해 거래에 나선다.
'자기'가 중심에 있는 한 주님과 함께 살아도 주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주님을 따르지도 못한다.
"예수와 맺은 우정을 깨뜨리고 그분의 '가벼운 멍에'를 내팽개친 이는
밖으로 나와 자유롭게 된 것이 아니라 다른 힘에 귀속된다." (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얼마나 자주 묻는 물음인가?
얼마나 많은, 드러낼 수 없는 비밀이 담긴 물음인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다시 던진다.
예수님과 유다 가운데 내 모습은 어느 쪽일까?
어느 쪽인지 구분하는 분기점은 이미 말씀에 드러나 있다.
자신을 비우고 내맡기는 편일까, 자신을 주장하여 팔아넘기는 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