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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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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6주일 나해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1-05-09 15:00   조회: 2,869회

본문


부활 제6주일 나해 -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은 부활 제6주일로, 다음 주일인 승천 대축일로 부활 시기가 마무리된다. 부활 시기 동안 독서와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들려주었다. 먼저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홀연히 나타나셔서 평화를 빌어 주시고, 성경을 풀어 주며 함께 식사를 하셨다. 그리고 당신은 양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이자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시며 우리는 양떼임을 일러주셨다. 이어서 주님은 당신이 하느님께서 심으신 참 포도나무고 우리는 그 가지라는 말씀을 들려주셨다. 오늘은 그동안 선포해온 부활의 의미를 전체적으로 정리하여 결론을 제시한다. 죽으심과 부활의 결론은 "사랑"이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 말씀을 평생 묵상한 복음사가 요한은 둘째 독서에서 사랑의 본질을 이렇게 일러준다.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온다"라는 말씀은 곧 사랑의 원천이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요즘은 농산물 등에 원산지 표기를 한다. 원천, 원산지에 따라 가격이 다른데 내용물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사랑 역시 어디에 원천을 두고 있는가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겠다고 서약한 사람들이 몇 해 못 가 싸우고 헤어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원산지가 변덕스러운 인간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원산지인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오신 예수님을 통해 드러났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드러난 사랑이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십자가 위에서 껴안으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 부활이었다. 이로써 사랑이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서 영원하게 되었다. 그렇게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사랑으로 드러나셨기에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드러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라고 초대하신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에 사랑 안에 머물라는 말씀은 하느님 안에 머물라는 말씀이다. 하느님 안에 머무는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노트커 볼프 신부가 체험한 이야기다. 독일 작은 마을에 아주머니 홀로 정육점을 하며 아들 다섯을 키웠는데 넷이 전쟁에서 죽었다. 막내가 정육점을 이어갔는데 그마저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다. 게다가 그 과부는 심한 당뇨로 한쪽 다리를 절단하였고, 정육점은 다른 사람 손에 넘겼다. 그 여인은 모든 것을 잃었다. 이보다 더 나쁜 상황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여인은 휠체어에 앉아 늘 묵주를 들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도 평온하여 주변 사람들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래서 볼프 신부가 어떻게 그렇게 평온할 수 있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는 이 모든 불행이 왜 내게 일어났는지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우리 모든 삶이 하느님 손에 놓여있다는 것 한가지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기도하며 하느님 안에 머물려고 하지요. 어느 날 이 모든 것도 끝나고 말겠지만, 그것 또한 지금 이 순간과 마찬가지로 제 삶의 일부임을 믿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놓아버리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어떠한 고난이나 역경에서도 밝고 편안하며 흔들리지 않는다. 이들이 누리는 평화는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듣기는 좋지만 실천은 어렵다.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사랑에 대해 이야기들 한다. 가족 사랑, 이성 간의 사랑, 자기애, 인류애 등등, 사랑에 관한 개념이 넘쳐나다 보니 참 사랑이 무엇인지 혼돈스럽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구약 성경에서는 ‘사랑’을 두고 "도딤(dodim)과 "아하바(ahaba)" 두 단어가 쓰인다. "도딤(dodim)"은 "찾아 헤매는 사랑"을 뜻한다.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좋은 사람, 편한 직장 등을 찾아 얻으려는 이 사랑의 특징은 소유의식이다. 내 사람, 내 재산, 내 식구 등 소유의식으로 사랑하면 내 것이니까 내 마음에 들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실망하고 상처받다가 증오로 변하기도 한다. 이 사랑은 내가 찾은 내 것이니까 나에게 이득이 되길 바라다가 득이 되지 않을 때는 내버리게 된다.

사랑을 뜻하는 다른 단어 "아하바(ahaba)"는 다른 이를 참되게 "발견하는 사랑"이다.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자기에게 맞는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랑과 대조적으로, 아하바는 상대방이 중심이 되어 상대방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존중하며 희생하는 사랑을 말한다.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아하바를 비슷한 발음의 아가페(agape)로 옮겼고, 오늘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사랑'은 바로 이 '아가페'다. 아가페의 사랑은 자기의 이익을 찾지 않고 감성적 행복에 도취되지도 않는다. 상대방의 존엄성을 발견하고, 상대방을 귀하게 섬기며 그의 행복을 찾는다. 이때 사랑은 성취가 아닌 포기와 희생이 된다.

그런데 포기와 희생으로 사랑이 끝난다면 손해만 보는 일이 아닐까? 십자가상의 예수님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로 나아갔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하바의 사랑은 더 높은 차원으로 성장하고 내적으로 정화되어 이제 결정적인 사랑으로 승화된다. 결정적인 사랑이란 두 가지 의미, 곧 사랑하는 분으로 넉넉한 갈림 없는 마음의 '단일성'과 사라지지 않는 ‘영원성’을 지닌다. 이 사랑은 시간을 비롯한 온 삶을 끌어안는다. 이 사랑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아버지께서 알려 주신 모든 것을 알게" 하여 궁극적인 것을 바라보게 한다. 곧 사랑은 영원을 바라본다. 그리하여 사랑은 더 높은 차원으로 성장하고 내적으로 정화하여 영원한 사랑, 하느님의 사랑으로 승화된다(베네딕토 16세,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6항 참조).

찾아 헤매는 소유적 사랑이 아닌 발견하는 영원한 사랑의 구체적 모델로 예수께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고 이르신다. 이는 바로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발견하고 섬기신 주님께서 행하신 사랑이다. 이 사랑이 죽으심과 부활이었다.  이어서 주님은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라고 말씀하신다. 종은 주인의 소유물이지만 친구는 믿어주고 존중하는 가운데 "발견하는 사랑"의 관계를 이룬다. 나를 발견하시고 믿어주시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도 그 사랑을 체험하라고, 찾아 헤매는 사랑에서 발견하는 사랑으로 나아가라고 초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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